첼리스트 자크린 뒤 프레
영국 음악계의 자존심 자클린 뒤 프레
뒤 프레의 생애
영화의 주인공 같은 불꽃같은 삶을 살다 간 자클린 뒤 프레는 1945년 옥스퍼드의 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뒤 프레라는 프랑스식 성은 그녀의 아버지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서 그녀의 가문은 대대로 영국에서 터전을 닦아온 집안이었다.
어머니는 훌륭한 피아니스트이자 저명한 교사로 딸의 음악적 재능을 키우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5세 생일 직전 뒤 프레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첼로 소리를 듣고 첼리스트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5세에 그녀는 허버트 워렌의 런던 첼로 스쿨에서 수학했고 이후 1955년부터 1961년에는 길드홀 음악학교에서 저명한 첼리스트인 윌리엄 플리스의 가르침을 받았다.
스승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의 천재성을 보인 그녀는 이후대가급 연주자들을 찾아다니며 배움의 길을 닦아 나갔다.
1960년에는 스위스에서 파블로 카잘스의 마스터클래스에 참가하여 실내악의 중요성과 더불어 거장으로서의 관점을 배우게 됐고, 1962년에는 파리에서 토르틀리에의 가르침을, 1966년에는 러시아에서 로스트로포비치의 가르침을 받았다.
특히 로스트로포비치는 뒤 프레의 재능에 감동을 받은 나머지 “내가 이룬 업적과 동등한, 아니 그 이상을 해낼 수 있는 젊은 세대의 유일한 첼리스트”라고 치켜세우기도 했다. 이렇듯 거장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그녀였지만, 뒤 프레는 항상 자신의 스승은 프리스라고 자랑스러워했다고 한다.
훤칠하게 큰 키에 밝은 금발의 생머리를 뒤로 넘겨 끈으로 묶고, 사춘기 남학생처럼 성큼성큼 걸어 나와 밝고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웃으며 관광객을 바라보며, 의자에 앉은 그녀의 활이 현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시원한 활시위에 애조 띤 음색이 흘러나오면 관객들은 소리 없는 환성을 질렀다.
자클린이 데뷔하고 나서의 5년간은 그녀와 음악계가 모두 즐거웠던 시절이었다. 클래식 음악계에 일찍이 그토록 기쁨과 활력을 준 처녀는 없었다. 그녀는 뛰어난 음악성으로 아름다운 연주를 사람들에게 선사했을 뿐 아니라 타고난 발랄함과 재기로 어디서든 기쁨을 선사했다.
자클린의 결혼과 발병
자클린을 사랑하는 것은 비단 팬들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열렬한 사랑에 빠졌고, 겨우 스물두 살의 나이로 결혼을 발표하였다. 상대는 그녀만큼 젊고 신동 소리를 듣던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인 다니엘 바렌보임이었다. 물론 당시 스물다섯 살의 바렌보임은 이미 피아노뿐 아니라 지휘의 대가였으며 번쩍이는 재능과 지성의 천재였다.
자클린에 비해 키가 15cm나 작은 유태인과 매력 넘치는 전 국민의 연인의 결합에 섭섭함을 숨기지 않았다. 심지어 일부 신문들은 “영국 산 장미와 이스라엘 산 선인장의 어울리지 않는 결합”이라고까지 표현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행복했다. 이제 사람들은 이 젊은 천재부부의 왕성한 연주 활동에 갈채와 환호를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을 드물게 성공적인 음악커플이라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연주회에서 첼로를 연주하던 도중 갑자기 자클린의 왼손의 힘이 빠지면서 지판을 짚던 손이 미끄러졌다. 사람들은 그녀가 많은 연주 때문에 너무 과로한 탓이라고 수군거렸다. 그러나 그런 일이 자꾸 반복되었다.
결국 자클린은 불치병인 ‘다발성 경화증’이란 진단을 받는다. 결헌 한 지 겨우 6년 만의 일이었고, 그녀의 나이 28세였다.
이것은 온몸의 신경과 근육들이 굳어 들어가는 무서움 병이다. 그녀는 자신의 분신과도 같았던 첼로를 더 이상 켤 수 없게 되었다. 게다가 점점 걷지도 못하게 되었으며, 처음에는 휠체어에 나중에는 침대에 의지해야만 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자클린은 결국 바렌보임과 헤어졌다. 그리고 그녀는 점차 세상 사람들의 기억에서 멀어졌다.
자클린의 사망
1987년은 이미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클린의 미소와 금발의 기억이 희미해졌을 때였다. 영국발 통신들은 “한때 음악계의 신성이었던 첼리스트 자클린 뒤 프레 여사가 다발성 경화증에 의한 호흡근육의 마비로 쓸쓸히 사망했다”라고 전 세계에 타전했다. 그녀의 나이 42세였다.
그녀가 남긴 음악
그녀가 남긴 것은 엘가의 협주곡 E단조이다.
뒤 프레는 처음 그녀를 유명하게 만들어주었던 존 바비롤리 경과 나중에 다시 만나 엘가의 첼로 협주곡을 녹음하여 음반(EMI)을 남겼다. 그래서 그녀는 갔지만 그녀의 첼로 연주는 영원히 우리 곁에 남아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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