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왔다 우부인 2023. 7. 14. 16:48

벤자민 프랭클린


벤자민 프랭클린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중 한 명

18세기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미국인 벤지만 프랭클린(1706년~1790년)은 발명가이자, 언론인이자 정치가였다. 그는 독립선언문과 미국헌법 최종안 두 문서에 서명한 인물이다. 프랭클린은 청교도가 지배하고 있을 당시 보스턴에서 태어나 장수를 누리고 산업 혁명이 시작되기 직전 필라델피아에서 사망했다.

미국 100달러 지폐는 미국의 국력과 경제력의 상징이고 특히 후진국애 서는 특권층의 전유물이라 엉클 샘이 미국 연방 정부의 권력과 군사력을 상징하듯이 100달러 지폐의 프랭클린 초상화는 미국 경제력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북한 주민들 조차 “김일성 할아버지보다 벤저민 할아버지가 힘이 세다. “는 말을 하기도 한다.

”최초의 미국인“

그는 동시대의 어느 인물보다 신생 국가 미국의 문화와 정치에 많은 기여를 했다. 그뿐만 아니라 전기를 발견하고 프랭클린 난로를 발명했으며 영향력 있는 신문도 발행했다. 당시 그의 명성에 대해 존 애덤스는 “뉴턴이나 프리드리히 2세나 볼테르의 명성보다 더 대단했으며, 이들 모두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존경을 받았다.”라고 썼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프랭클린을 가리켜 “최초의 미국인”이라고 했다.

시인 프랭클린

벤저민 프랭클린은 17세기말 보스턴으로 이주한 양초 제작자 조슈아 프랭클린의 열다섯째 아이였다. 12세부터 신문 인쇄업을 하는 형의 일을 도왔는데, 처음에는 인쇄기를 돌리는 일을 맡았지만 곧 신문 기사를 쓰기 시작했다. 프랭클린은 고마워할 줄 모르는 형 밑에서 일하는 것이 싫어지자 17세에 필라델피아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신문과 재미있는 책들을 출판했고, 나중에는 필라델피아이서 가장 유명한 시인이 되었다.

발명가 프랭클린

무한한 재능과 호기심을 지녔던 프랭클린은 병원과 보험회사, 철학 학회, 대학(지금의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을 설립했고, 모두 오늘까지 남아 있다. 인쇄업에서 은퇴한 후에는 과학으로 관심을 돌려 전기의 성질을 연구하고 이중초점 렌즈와 열효율이 높은 프랭클린 난로를 발명했다.

정치인 프랭클린

미국 식민지들이 영국의 지배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한 1740~60년대에 프랭클린은 영국에 머물고 있었다. 그는 영국 의회에서 미국 식민지 주민들의 입장을 대변했다. 런던에서 미국으로 돌아올 때는 영국으로부터 미국 식민지를 분리해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1776년 드디어 필라델피아에서 미국 독립선언문이 반포되었다.

그는 신생 국가 미국을 대표하는 대사로 프랑스를 방문했다. 프랭클린은 그의 과학적 업적 덕분에 유럽에서 이미 유명인사였다. 많은 유럽인들은 단지 위대한 과학자가 관련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신생 국가를 신뢰했다. 프랭클린은 다시 펜실베이니아로 돌아왔고 계속 국가를 위해 일하다가 84에 세상을 떠났다.

벤자민 프랭클린의 좌우명

“Those who would give up essential Liberty,
to purchase a little temporary Safety, deserve neither Liberty nor Safe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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