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음악사를 대표하는 카라얀
클래식에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조차도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들어봄직한 인물이다,
20세기를 대표하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휘자들 가운데 한 명이며 세계 최고의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중 하나인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에서 35년간 종신 지휘자로 군림한, 클래식 음악의 전설이다.
카라얀의 어린 시절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1908년 4월 5일 외과의사인 에른스트 폰 카라얀과 슬로바키아 출신인 어머니 마르타 사이에서 차남으로 모차르트의 숨결이 남아있는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났다. 그리스계의 유복한 가정이었다.
카라얀은 어릴 적에 피아노의 신동으로 유명했다. 1916년부터 1926년까지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에서 공부할 때 스승으로부터 지휘에 집중하라는 충고를 받고 지휘로 전향했다. 1928년 12월 27일 빈에서 처음 정식으로 지휘대에 서 보았던 카라얀은 고향 잘츠부르크로 돌아온 직후 1929년 1월 22일, 모차르테움 대강당에서 데뷔 콘서트를 열었다.
카라얀의 데뷔
프로그램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살로메>였다. 약관의 나이에 데뷔할 수 있었던 건 외과 의사이자 지역 유지였던 아버지의 도움 때문이었다. 이 콘서트를 계기로 울름 시립극장의 카펠마이스터(지휘자)가 된 카라 안은 1933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막스 라인하르트 연출의 <파우스트> 중 발푸르기스의 밤 장면을 지휘하며 데뷔했다. 카라얀은 이해 나치당에 가입했고, 이후 그를 향한 가장 큰 비난의 빌미가 되었다.
카라얀의 승승장구
1934년 카라얀은 처음으로 빈 필을 지휘했고 1937년 빈 슈타츠오퍼에 데뷔했다. 1934년부터 1941년 아헨 극장의 음악감독 겸 지휘자로 일한 카라얀은 1939년에는 베를린 슈타츠오퍼의 상임 지휘자 자리에 오른다. 독일에서 활동하는 지휘자 중 최연소로 손꼽혔던 그는 부쿠레슈티, 브뤼셀, 스톡홀름, 파리 등 유럽 각지에서도 객원지휘를 했다.
1937년, 카라얀은 베를린 필을 처음 지휘했고 <피델리오>를 공연하며 베를린 슈타츠오퍼에 데뷔했다.
1938년 베를린 슈타츠오퍼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공연했을 때 베를린의 평론가는 그를 ‘기적의 카라얀’이라고 절찬하며 “바그너의 대작을 성공리에 공연해 현재 독일 최고의 바그너 지휘자인 빌헬름 푸르트뱅글러,
빅토르 데 사바타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라고 평했다. 이 해에 도이치 그라모폰과 계약한 카라얀은 베를린 슈타츠카팔레를 지휘해 모차르트 <마술피리> 서곡을 시작으로 여러 장의 음반을 녹음했다. 1938년 그는 오페레타 가수인 엘미 헐 게를 뢰프와 결혼했는데 얼마 못 가 1942년 이혼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맹렬한 기세를 떨치던 1942년 카라얀은 두 번째 결혼을 한다. 상대는 ‘아니타’로 불리던 안나 마리아 자우에스트였다. 재봉틀용 실을 생산하는 사장의 딸이었고 조부가 유태인이었던 그녀는 1/4 정도는 유태인으로 간주되었다.
1944년 무렵 카라얀은 나치 정권에 대해 흥미를 잃었고, 연주도 별로 하지 않았다고 회고했지만, 실상은 전쟁 중이던 1945년 2월 18일 콘서트를 지휘하는 등 여전히 나치 치하에서 활동했다. 독일을 떠났던 것은 잠시 밀라노에 머물렀을 때뿐이었다. 전쟁이 막바지에 달하자 카라얀은 가족들을 이탈리아에 이주시키고 빅토르 데 사바타의 부지휘자로 일했다. 카라얀은 1946년 3월 나치와의 협력 관련하여 무혐의로 풀려나고 곧바로 지휘를 재개했다.
자유의 몸이 된 카라얀은 1946년 빈 필을 지휘해 전쟁 후 첫 콘서트를 가졌다. 그러나 이후 소련 점령군 당국이 태클을 걸었다. 카라얀이 나치당의 회원이라는 이유로 지휘활동을 금지헌 것이다. 이 해 여름 카라얀은 가명을 내세워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 참가해야 했다.
연합국 측의 결정으로 한동안 공식적인 지휘 활동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이 개인적으로는 치욕스러운 일이었겠으나, 훗날의 대지휘자를 위해서는 장점으로 작용햤다는 분석도 있다. 운신의 폭이 좁아졌던 탓도 있어 카라얀은 여러 작품의 악보를 공부하거나 다른 지휘자들의 공연을 참관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고, 이는 그에게 큰 자산이 되었던 것이다.
카라얀은 결국 1947년 지휘를 재개했다. 카라얀의 개인사를 말할 때 끊임없이 논란이 되는 이유는 그가 정치 강령이나 반유태인 정책에 공감한 것은 아니었지만, 거기엔 일종의 미필적 고의와 같은 용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많은 이가 지적하는 출세 지향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카라얀이 자신의 연주 활동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엄청난 능력과 노력의 결과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1949년 카라얀은 빈 악우협회의 예술감독이 되었다. 그는 밀라노 라 스칼라에서도 지휘를 했는데, 이 시절 카라얀의 가장 중요한 활동은 EMI의 프로듀서 윌터 리그가 런던에서 새로 창단한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를 지휘해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앙상블로 만드는 일이었다. 최고의 연주자들을 뽑아 오케스트라를 결성한 레그가 그 지휘자로 카라얀을 낙점한 것은 결과적으로 두 사람 모두에게 이득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음반 산업의 전기를 마련했다.
이때 이루어진 일련의 녹음 작업을 통해 가라 얀은 대중적인 인지도와 명성을 더욱 확장할 수 있었으며, 훗날 자신에게 도래할 영광의 세월을 성공적으로 준비할 수 있었다. 이 해부터 카라얀은 루체른 피스티벌에 참 거하기 시작했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종신 음악감독
1951년과 1952년 카라얀은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 지휘했다. 1957년부터 1964년까지는 빈 슈타츠오퍼의 예술감독으로 재임한 카라얀은 빈 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베를린 필을 위헌 부활절 음악제를 만들어 음악감독 퇴임 이후에까지 베를린 필과의 끈을 마련했다. 1958년 아니타와 이혼한 카라얀은 세 번째 부인인 프랑스 모델 엘리엣 모레와 결혼했다. 카라얀은 일리엇과의 사이에서 두 딸 이사벨과 아라벨을 두었다. 후 카라얀은 20세기 클래식 제국의 황제로서 재임했다. 1989년 오스트리아 아니프에서 사망할 때까지 연주와 지휘, 음반 녹음을 계속했다.
대부분 베를린 필과 빈 팔을 지휘한 결과물이었다. 이들 두 악단은 카라얀의 절정기를 함께한 최고의 파트너였다.
카라얀이 베를린 필과 첫 인연을 맺은 것은 1937년이었다. 그로부터 17년 뒤인 1954년 푸르트뱅글러의 갑작스러운 사망 이후 베를린 필은 미국 투어를 이끌 지휘지로 카라얀을 선택했다. 카라얀은 이를 계기로 실권을 얻고 종신 음악감독직을 요구해 얻어낸다. 1955년 드디어 베를린 필의 음악감독에 취임한 카라얀은 베를린 필을 통해 ‘꿈의 오케스트라’를 실현하려 했다.
카라얀의 ‘눈 감은 지휘’는 지휘자와 악단원들 사이에 교감이 완전해야만 가능하다. 그것은 음악에 대한 관이 뚜렷하고 치밀하고 완벽한 연습이 동반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베를린 필 단원들에 의하면 카라얀은 리허설의 재단이 완벽한 지휘자였다. 정해진 시간을 넘기는 일 없이 신사적인 분위기에서 리허설은 진행되지만 완벽주의자적 기질 때문에 리허설의 긴장감이 대단했다고 한다.
카라 안의 말년
카라얀의 말년에는 베를린 필과의 불화가 있었다. 1982년 솔리스트인 자비네 마이어를 입단시키려 했으나, 단원들의 반대로 불화가 시작되었고, 1984년 방일공연 당시에는 ‘돈 후안’ 공연 중 초반 솔리스트의 연주가 꼬이는 바람에 처음부터 연주를 다시 시작한 일도 있었다.
1989년 7월 16일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의 자택에서 소니 부회장과 자신의 부지에 CD공장을 짓는데 관한 대화를 나누다 심근경색으로 타계했다. 전날 조수미와 리허설을 할 때부터 심장이 좋지 않았는데, 사망 당일 주치의가 방문했으나 ‘중국의 황제가 와도 방해할 수 없다’며 돌려보냈고 그게 화근이 되어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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