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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일상 맛집/다양한 상식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 프란츠 리스트

by 왔다 우부인 2023. 4. 24.


불세출의 피아니스트

역사상 최고로 꼽히는 피아니스트이자 낭만주의 음악사에서 쇼팽과 함께 피아노 음악의 역사 전반으로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리하르트 바그너와 함께 19세기 서양음악 전반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양대산맥 격의 인물이다.

프란츠 리스트가 피아노 옆에 서면 사람들은 먼저 그의 모습에 매료되었다. 그의 아름다운 눈을 바라볼 때면 누구라도 그 눈의 신비스러움에 벗어날 수 없었다. 귀족적인 금발의 고수머리, 반듯한 체격, 세련된 스타일, 감각이 뛰어난 옷차림, 어느 것 하나 그가 유럽의 변방 헝가리에서 온 농장 관리인의 아들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품위가 넘쳤다.

그렇게 처음 리스트를 보고 놀란 사람들은 두 번째 충격을 받게 된다. 보통의 피아니스트들이 자신의 실력을 입증하는 데는 음악회가 시작되고 최소한 한 시간은 걸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피아노 앞에 앉은 리스트의 길고 흰 손이 건반에 닿는 순간부터 관객들은 평생 다시는 만나기 어려운 피아노 연주자- 최소한 베토벤이나 쇼팽에 대등하게 견줄 수 있는- 앞에 앉아 있음을 감사하게 여기게 된다.

리스트의 콘서트는 대부분 자작곡이나 쇼팽의 곡들로 채워졌다. 그 외에는 베토벤 등 지극히 고전주의적인 몇 곡뿐이었다. 그러나 앙코르라도 받으면 그는 베토벤의 교향곡이나 이탈리아 오페라를 자작 편곡으로 화려하게 들려주어, 그렇지 않아도 감동의 절정에 이른 청중들은 마지막 한 방으로 완전히 넉다운시키고 마는 것이었다.

리스트의 생애



리스트는 오스트리아의 외딴 시골 라이딩에서 1811년 10월 22일 태어났다. 아버지는 에스테르하지 후작의 집사로서 대단한 음악 애호가였으며, 아이는 프란츠 하나였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프란츠도 일찍부터 음악과 친해지고 9세 때 피아노 연주회를 열었다. 그 성공에 의해 고장의 귀족으로부터 6년간의 학자금을 보증받고, 빈에서 체르니(Carl Czerny)에게 피아노를, 또 살리에리에게 작곡을 배우게 된다. 1823년(12세) 빈에서의 제2회 연주회는 베토벤이 참석해 축복을 받았고, 또 같은 무렵 슈베르트에게도 소개된 적이 있다.

1823년 아버지와 함께 파리에 가서 음악원을 지망했으나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거부되고, 결국 작곡만을 개인 교수에 의해 배우게 되었다. 한편, 이듬해의 런던 여행을 시발로 해서, 이후 파리를 거점으로 하는 연주 여행이 정기적으로 행해지게 된다. 이 동안 작곡가로서도 데뷔했지만, 이 면에서의 평판은 연주가로서의 명성에는 아직 미치지 못했다. 1827년(16세) 아버지의 죽음으로 연주 여행을 중단, 이후 수년간은 파리에 정주하여 음악교사의 생활을 계속한다.

1824년(31세)에 바이마르 궁정의 음악 감독•지휘자로 취임, 매년 3개월간 이곳에서 복무하게 되었다. 리 직무는 연주 여행의 중요한 일정이 되고 있었는데, 1848년부터는 바이마르에 이주하고, 다시 이듬해에는 그를 쫓아온 비트겐슈타인 백작 부인 카롤리네와의 사랑의 보금자리를 여기서 꾸미게 된다. 이리하여 바이마르는 리스트의 왕성한 활동의 새로운 거점이 되고 바그너, 베를리오즈, 슈만 등의 작품이 적극적으로 상연되어 갔다.

1858년(47세) 바이마르의 공직을 물러나고, 1861년에는 카롤리네와의 정식 결혼 허가를 교황에게 청하기 위해 로마를 방문했다. 그러나 생각지 않던 파국이 두 사람을 덮쳐, 낙담한 리스트는 그대로 로마에 머무르고 종교 음악에의 정진을 결심한다. 바이마르로부터 복귀 요구가 있어서 1869년 또다시 이 고장을 방문했는데, 이 해에 사제직을 얻은 뒤로는 언제나 제의를 입었다고 한다. 1871년 고국 헝가리 왕으로부터 국립 음악 학교의 개혁을 의뢰받고 부다페스트 음악 학교 교장에 임명되었다.
이것을 계기로 고국에서의  연주, 교육 활동도 왕성하게
펼쳐져 간다.

사위 바그너

딸 코지마의 남편이었던 바그너는 리스트의 사위가 되지만, 또 훌륭한 친구이기도 했다. 이 두 음악가의 성격은 많은 점에서 공통되어 있었던 것이다. 만년의 리스트는 그 정력의 대부분을 ‘종합 예술‘이라는 바그너의 커다란 이상의 실현을 위해 소비되었다고도 할 수 있는데, 그런 만큼 1883년(72세)에 바그너를 잃은 슬픔은 컸다. 1886년에는 바그너 탄생 75주년을 축하하는 음악제가 각지에서 열려 리스트는 런던, 파리를 거쳐 바이로이트로 향했는데, 그 도중에 폐렴에 걸려 7월 31일 바이로이트에서 타계했다.

주요 작품

단테 교향곡
파우스트 교향곡
교향시 전주곡
교향시 타소 비탄과 승리
교향시 마제타
피아노 협주곡 제1번 E플랫장조(협주곡)
피아노 협주곡 제2번 A장조(협주곡)
죽음의 무도
헝가리 환상곡
초절 기교 연습곡
파가니니 대연습곡
피아노 소나타 b단조(독주곡)
헝가리 랩소디
사랑의 꿈

종종 리스트는 자신을 일컬어 “나의 절반은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수도사이며, 나머지 절반은 헝가리 출신의 집사”라고 말했다. 이렇게 리스트는 정신적으로는 신부였고, 육체적으로는 집시였다. 그는 유럽의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살았고, 인간이 맛볼 수 있는 모든 인기와 쾌락을 다 맛보았다. 그러나 그 어느 것에도 완전한 안주와 평화를 찾지 못했던 그는 영원한 방랑자였고 집시였다.

그는 집시들의 춤곡을 채집하고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그는 마흔 살부터 반평생 동안 헝가리풍의 열정적인 피아노곡들을 <헝가리 광시곡>이라는 이름으로 하나씩 발표했다. 모두 19개의 <헝가리 광시곡>은 1번부터 15번까지는 1851년부터 1853년 사이에 작곡되었으며, 16번부터 19번까지는 1882년 이후에 발표되었다. 대부분의 곡들은 짧고 정열적이다. 이 곡들은 대부분 ’ 차르다시‘라고 하는 집시들의 춤곡 형태인데, 느리고 애수를
띤 ’ 로수‘와 빠르고 격정적인 ’ 프리시‘의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헝가리 광시곡>은 원래 피아노 독주를 위해 만들어졌지만, 그중 몇 곡은 나중에 관현악으로 편곡되어 더 유명해지기도 했다. 관현악곡 중에서는 특히 2번, 4번, 5번이 유명하다. 그런데 피아노곡의 번호가 달라서, 혼돈되기 쉬우니 유의해야 한다.

그는 영원한 방랑자요, 영원한 유럽인으로 우리들의 가슴속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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