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범한 두 예술가의 만남
여류라는 것만으로도 화제가 되던 19세기에 조르주 상드는 여류 소설가로서 필명을 드날렸다. 그녀가 유명했던 것은 다만 그녀의 작품 때문만은 아니다. 도리어 상드라고 하면 남장을 한 채 남자 문필가들과 어울렸던 여걸 또는 연하의 예술가들, 즉 시인 뮈세와 작곡가 쇼팽과의 애정행각으로 더 잘 기억되고 있다. 어쨌든 그녀는 문학뿐 아니라 쇼팽의 음악적 창조에 결정적 기여를 했던 여성으로 음악사에도 자신의 이름을 남기는 데 성공했다.
조르주 상드는 어떤 여자였던가? 그녀의 본명은 오로르 뒤팽이었으며, 파리의 유복한 가정에서 귀여움을 독차지하는 딸로 태어났다. 그러나 불행히도 네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할머니 집에서 자라게 된다. 거기에서 그녀는 아버지를 대신할 가정교사를 만나게 되는데, 그가 바로 문악, 신학, 의학, 물리학에 뛰어났으며, 계몽사상을 가졌던 뛰어난 지식인 데상틀이었다.
그의 혜안은 상드라는 걸출한 인물을 만들었고 , 그것은 쇼팽의 불세출의 음악들로 이어지는 것이다. 가정교사 대살틀은 이 영특한 소녀가 정신과 육체의 완벽한 조회를 이룬 훌륭한 인격체가 되기를 원했다. 여자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육체적으로 성장해 가는 소녀의 몸과 마음이 좁은 스커트와 코르셋 속에 묶이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해ㅛ던 그는 그녀에게 남자아이들이 입는 놀이옷을 만들어 입혔다. 그리하여 상드는 바지를 입고 소년들처럼 들판을 뛰고, 공도 차고, 말도 타게 되었다.
그것은 다만 놀이에 그쳤던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보는 안목마저 넓혀주었다. 사춘기가 되자 그녀는 수녀원 기숙학교로 들어가면서 가정교사와 작별한다. 그녀는 수녀원을 졸업하고 열여섯 살 때 지방의 남작과 결혼하지만, 두 아들을 출산하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혼한다. 그리고 아이들을 데리고 파리로 온다. 이제 그녀는 생활비를 스스로 해결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그녀 나이 26세였다.
이때 그녀가 택한 것이 어린 시절 경험했던 남장과 상드라는 필명이었다. 경제적이고 일하기 편리하다는 이유로 택한 남장이었지만, 복장은 그녀에게 많은 이점을 주었다.
즉 남장을 함으로써 상드는 콘서트, 오페라, 연극, 카페, 남성전용 클럽 등을 드나들 수 있었고, 그것은 당시 여성으로 수는 상상할 수도 없는 많은 경험과 넓은 시야를 그녀에게 제공하였다.
사람들은 간혹 상드를 여권주의자나 중성적 인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상드야말로 여성 중의 여성이었다. 남장이 여성의 불편함을 감추어 주기도 하지만, 또한 성적인 매력을 더욱 발산하는 장점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그녀는 잘 일고 있었다. 그런 상드는 연하의 시인 알프레드 뮈세와 세간을 떠들썩하게 하는 사랑에 빠진다. 둘의 연애는 뜨거웠지만, 예민했던 두 사람 모두에게 깊은 상처를 남기고 끝난다. 그런 상드에게 새로운 남자가 바르샤바에서 온 프레데릭 쇼팽이었다. 파리 살롱가에 나타나 사교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매력적인 폴란드 피아니스트의 나이는 겨우 21세였다.
이미 폴란드에서 닦은 빼어난 피아노 실력과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낭만성으로 무장한 그가 파리 사교계를 정복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의 연주는 탁월했으며, 음악은 독창적이었다. 당시 파리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절정기에 있었고, 로시니나 벨리니 등이 모두 파리의 스타였다. 쇼팽도 오페라에 완전히 매료되었으며, 벨리니를 우상으로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은 쇼팽이 당연히 오페라로 나아가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부귀와 명예가 보장된 오페라의 길을 거부했다. 그는 당시로서는 가장 위험하고 새로운 세 가지 험난한 길— 그러나 쇼팽이 아니면 그 누구도 갈 수 없었던 길—을 선택했다.
첫째는 오페라가 아닌 소품을 자신의 주 무기로 택했다는 것, 둘째는 오케스트라를 버리고 단 한대의 피아노만을 택했다는 것, 그리고 셋째는 극장이 아니라 몇 사람의 소수정예 관객만을 위한 살롱을 무대로 택했다는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쇼팽처럼 자신을 잘 알고 상품화하는 데 성공한 예도 드물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결과를 알 수 없는 모험이었다. 그런 그를 확실하게 알아본 사람의 하나가 상드였다. 파리 사교계의 두 스타는 이제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였다.
그들의 사랑이 시작될 무렵, 쇼팽의 건강은 이미 좋지 않았다. 그러나 상드에게는 그의 심각한 천식도 보살펴야 할 사랑의 대상일 뿐이었다. 이미 상드는 두 아들과 연하의 애인 뮈세를 돌보지 않았던가?
쇼팽과 상드의 만남과 음악 그리고 쇼팽의 죽음은
다음 2편에서 계속된다
#마요르카 #쇼팽 #조르주 상드 #로시니 #벨리니
#데살틀 #알프레드 뮈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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