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지휘자 열전 첫 번째 카를로스 클라이버
카를로스의 생애
아버지 에리히 클라이버의 국적은 오스트리아지만, 카를로스는 1930년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베를린 국립오페라 극장의 음악감독으로 있었던 시절이었다.
당시 아버지 에리히는 푸르트벵글러와 비슷한 연배로 그와 대적할 만한 라이벌이었다. 그러나 나치가 푸르트벵글러를 전면에 세우고 그를 후원하는 등 독일 음악계가 정치적 색채를 띠자, 이에 회의를 느끼고 유럽을 떠난다.
당시 다섯 살의 카를로스는 아버지를 따라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이주하게 되고, 아버지는 그곳에서 직장을 구한다. 그리고 에리히 클라이버는 오스트리아 국적을 단호하게 버리고, 아르헨티나를 새 조국으로 삼았다.
카를로스는 어려서부터 지휘자가 되기를 원했으나, 베를린에서의 쓰디쓴 경험을 기억하는 아버지는 한사코 반대했다.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아들에게 별도의 음악공부를 시킨 적이 없었다. 전쟁이 끝나고 나치가 패망하자 푸르트뱅글러는 나치 정권에 협조했다는 혐으로 기소되고, 에리히는 독일로 돌아가 베를린 국립오페라의 감독으로 복귀한다.
아버지와 함께 유럽으로 돌아온 카를로스는 아버지의 강권으로 취리히 연방공과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그는 화학공학을 전공했지만, 관심은 늘 음악에 있었다.
결국 1953년 카를로스는 아버지 몰래 뮌헨의 3류 극장인 ㄱ겔트너플라츠 극장에 무급의 수습 보조로 취직하게 된다. 분노한 아버지는 아들을 단 한 번도 도와주지 않았다. 그러나 카를로스는 이에 굴하지 않고 극장의 밑바닥 일부터 배웠다. 그는 극장에서 일어나는 거의 모든 일을 겪었고, 이때의 경험은 훗날 지휘자로서 성공하는 데 큰 자산이 되었다. 카를로스는 타고난 음악성과 직관력으로 점점 능력을 인정받게 되었다.
카를로스 클라이버는 슈투트가르트 극장에서 베버의 <마탄의 사수>를 지휘하여 대성공을 거둔다. 이어 1974년 바이로이트 음악제에 초청되어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지휘함으로써, 세계 정상급 지휘자의 반열에 올랐다. 그리고 이 무렵부터 녹음을 시작했다. 그는 첫 녹음곡으로 자신의 장기인 베버의 <마탄의 사수>를 선정했는데, 이 음반은 발매되자마자 단번에 최고의 명반이 되었다. 그 후에 나온 음반들은 비록 그 수는 많지 않지만, 모두 손에 꼽는 명반이 되었다. <박쥐>, 베르디의 <라트라비아라>, <브람스 교향곡 4번>, <슈베르트의 교향곡 8번>등 어느 것 하나 최고가 아닌 것이 없다.
이렇게 클라이버가 정상에 서게 됨으로써 , 부자가 모두 정상급 지휘자가 되는 음악사상 유리가 없는 기록이 만들어졌다. 많은 극장에서 그를 원하였지만, 클라이버는 단 한 번도 특정 극장이나 오케스트라의 감독이나 지휘자 직책을 맡은 적이 없었다. 그는 항상 프리랜서로 지내면서, 자신이 원할 때에 원하는 곡을 원하는 극장에서 지휘할 뿐이었다. 이런 그를 두고 사람들은 괴팍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어려서부터 보아온 아버지의 고생이나 젊은 시절 전전해온 극장의 실상을 알고 있었기에 상임 지휘자란 직책이 너무나 비음악적임 것으로 여겨졌다. 그는 오케스트라나 극장 감독이 갖게 되는 인사와 행정 또는 외교 등의 많은 일들- 간혹 어떤 이들은 이것을 더욱 즐기기도 하지만- 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극장 감독이나 상임 지휘자가 그에게는 예술가로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돈이 필요해서 무대에 오르는 것이 어찌 비난거리가 될 수 있으랴. 모차르트나 베토벤도 그러했다.
그는 다만 지휘하고 싶을 때 지휘하는 예술가였다. 일정한 거처도 없고 자주 연락도 두절 돠는 그가 전화 한 통만 하면, 지휘대를 내어주는 몇몇 극장과 오케스트라들(주로 뮌헨과 취리히 등이다)을 보면, 그의 실력을 짐작할 수 있다.
카를로스의 음악
클라이버의 명녹음들 중에서 단연 첫손에 꼽고 싶은 것은 루드비히 판 베토벤의 교향곡 제5번 C단조 op .67이다.
흔히 <운명>이라고 불리는 이 음악은 과연 클래식의 대명사이다. ‘운명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 같다’는 그 익숙한 네 개의 음으로 시작되는 1악장은 강렬하면서도 착실한 곡의 전개가 마력을 발휘한다. 조용하고 서정미가 넘치는 2악장을 거치면, 3악장에서 4악장에 이르는 힘과 정열의 폭발은 인간의 존재를 웅변하는 듯ㅊ찬란하게 전개된다.
1975년에 클라이버가 빈 필하모니와 함께 <운명 교향곡>을 그의 최초의 베토벤 음반(DG)으로 내놓았을 때, 반응은 실로 폭풍과 같았다. 빈 필하모니의 정연하고 탄탄한 연주실력은 클라이버의 예리한 지휘봉 아래에서 마치 명검이 주인을 만난 듯이 휘몰아친다. 연주는 시종 긴장미에 넘치며 놀라운 음장감으로 듣는 이를 압도한다. 그리고 마지막 4악장에서 터지는 승리의 알레그로는 바로 자유를 갈구하는 클라이버 자신의 의지를 천명하는 것처럼 들린다. 베토벤 교향곡 9번이 ‘환희의 송가’라면, 클라이버의 5번은 ‘자유의 송가’이다.
5번의 성공에 이어 다음 해 1976년에 나온 것이 베토벤 교향곡 제7번 op.92이다. 베토벤의 아홉 개의 교향곡 중 몇 가지는 유명한 표제로 흔히 불리는데, 3번 <영웅>, 5번 <운명>, 6번 <전원>, 9번 <합창>이 그것들이다.
표제 때문이지 이 네 곡의 인기는 다른 다섯 작품을 훨씬 앞선다. 표제가 붙지 않아 우리에게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지만 그에 못지않은 걸작으로 7번이 있다. 교향곡 7번은 기법상의 구성과 전개 등을 볼 때는 , 도리어 베토벤의 교향곡들 중 수위에 놓을 수 있다. 이 곡의 분위기는 여러 면에서 5번과 닮았다.
빠른 템포로 휘몰아치는 1악장이나 서정적인 2악장도 그러하고, 변화무쌍한 3악장의 무곡도 그러하다. 특히 마지막 악장은 여러 가지 요소들이 모두 합쳐져서 하나의 절정을 향하여 치닫는다. 마치 5번에서 들려주는 폭발을 연상시킨다. 클라이버의 7번 연주는 너무나 긴박하고 질풍과 같은 절정은 참으로 호쾌하다. 역시 빈 필과 녹음한 이 음반(DG)은 어쩌면 5번 보다도 클라이버의 개성이 더욱 잘 나타나고 있는 그의 진수라고 볼 수 있다.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환갑이 넘었을 때, 오스트리아 대통령은 그에게 오스트리아 시민이 되기를 제의했다. 만시지탄이었지만 그는 40년 전에 세상을 떠난 아버지 대신에 오스트리아 국적을 받아들임으로써, 2대에 걸쳐 방황했던 부자는 조국으로 돌아왔다.
클라이버의 마지막 시간
클라이버는 평생 대중의 시선에서 벗어나고자 했으며 공식적으로 인터뷰를 한 적이 없다.
지병인 전립선암을 앓던 클라이버는 아내 스탄카의 나라인 슬로베니아의 한 별장에서 향년 74세로 2004년 7월 13일에 사망했다. 사망 전 뮌헨 교외 그륀발트에 거주하고 있었으나 슬로베니아의 류블랴나르는 작은 마을의 스탄카 옆에 묻히기까지 사망 소식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아들 Marko와 딸 Lillian 등 두 자녀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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