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명 바이올리니스트 하이페츠
하이페츠는 역사상 가장 정확한 테크닉을 구사한 바이올리니스트로 손꼽힌다. 야사 하이페츠가 이루어낸 카리스마적인 업적은 그가 태어난 지 한 세기가 훌쩍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효하다. 바이올린이라는 악기의 가능성을 모든 방향에 있어서 극대화한 연주가였다.
하이페츠의 어린 시절
그는 1901년 2월 2일 제정 러시아 지배하의 리투아니아의 빌니우스라는 작은 유태인 거주지에서 태어났다. 대부분의 천재들이 그러하듯이 그는 이미 세 살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바이올린을 배웠다. 다섯 살에는 왕립음악원에서 아우어의 제자였던 일리아 다비도비치 말킨에게 사사했다. 1년 후에는 멘델스존의 협주곡을 연주할 구 있을 정도로 두각을 보였던 그는 여덟 살 무렵에 학교를 졸업했다.
당대의 교육자였던 레오폴드 아우어는 곧바로 페테스부르크에 있는 자신의 학교로 데려가 체계적인 학습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1911년 오데사와 페테스부르크, 베를린 등지에서 공개 연주회를 갖게 된 하이페츠는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고, 이를 계기로 아르루트 니 키쉬가 이끄는 베를린 필하모닉과 차이콥스키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하며 전 유럽에서 가장 각광받은 ‘분더킨트(신동)’로 발돋움하여, 이미 10대 이전에 ‘하이페츠’로 완성되었다는 점이 놀랍다.
그와 함께 페테스부르크에서 레오폴드 아우어의 가르침을 받았던 샤샤 라레르손은, 전성기 시절의 하이페츠의 연주를 듣고는 어린 시절의 연주와 똑같다며 “전혀 발전하지 않았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다시 말하자면 그만큼 하이페츠의 재능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갖추어져 있었던 것이다. 니 키쉬의 도움으로 여러 도시에서 연주회를 가지며 너무도 일찍 개화한 자신의 재능을 맘껏 펼칠 수 있었던 하이페츠는 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더불어 다시 러시아로 돌아갔다.
하이페츠의 음악과 명성
19세기가 파가니니의 시대였다면 20세기는 하이페츠의 시대였다고 말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완벽에 가까운 테크닉, 기계적일 정도로 정확한 템포 조절, 한 음 한 음에 부여하는 긴장감, 머리카락을 곤두서게 할 정도의
카리스마를 통해 하이페츠는 바이올린 연주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더 나아가 그는 방대한 레퍼토리와 엄청난 리코딩, 독주와 협주, 실내악, 교육을 오가는 왕성한 음악 활동을 통해 20세기 바이올린계의 존경받는 거장으로서 권위와 명성을 얻었다.
하이페츠가 활동하던 당시 전 세계에는 많은 바이올리니스트들이 함께 호흡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이페츠의 등장으로 인해 자의든 타의든 대부분의 바이올리니스트들은 자신의 존재감을 하이페츠의 그림자 안으로 밀어 넣을 수밖에 없었다. 하이페츠를 길러낸 명교사 레오폴드 아우어의 제자들 경우만 보더라도 그러하다.
당시 아우어의 제자들 가운데 ‘바이올린의 악마’로 일컬어졌던 토샤 자이델은 미국에서 이렇다 할 성공을 거두지도 못하고 사라져 버렸고, ‘바이올린의 귀공자’로서 우아함을 뽐냈던 예프렘 짐발리스트는 연주 활동보다는 커티스 음악원에서 교육자로 남아있기를 원했으며, 미론 폴리아킨은 소련에 머무르며 짧은 생을 뒤로한 채 그 큰 날개를 접을 수밖에 없었다. 여류 바이올리니스트로 ‘바이올린의 귀부인’으로 평가받던 이졸데 멩게스는 주로 영국에서 활동했고, ‘황금의 보잉’으로 유명했던 캐슬린 팔로우 또한 캐나다에서 조용히 후학을 양성했다.
하이페츠 등장 이전까지 ‘황금 톤’으로 최고의 명성을 구가하던 미샤 엘만은 그 위세가 꺾이고 말았다. 그나마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온 나탄 밀스타인과 레오폴드 아우어의 마지막 제자인 오스카 슘스키 정도가 하이페츠가 전성기를 마칠 무렵인 1950년대 말부터 주목을 받을 수 있었다.
2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유럽 대륙은 미국보다 그나마 하이페츠의 공습을 덜 받은 편이었지만, 19세기를 호령했던 요제프 요하임의 영향력은 하락하기 시작했다. 당시 전 세계를 통틀어 하이페츠에 대항할 수 있었던 바이올리니스트는 죠르쥬 에네스쿠와 아돌프 부쉬의 계승자로 일컬어지는 신동 출신의 예후디 메뉴힌, 이미 거장의 반열에 올라섰던 요제프 시게티 정도였다.
이러한 그에게도 우상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프리츠 크라이슬러다. 크라이슬러는 1912년 5월 베를린에서 10세의 하이페츠가 연주하는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듣고는 사석에서 그를 위해 자신의 작품 (아름다운 로즈마린)의 피아노 반주를 맡아 연주하기도 했다. 유명한 일화 중의 하나로, 크라이슬러는 하이페츠의 연주회 때 옆에 있던 다른 바이올리니스트이게 “이제 우리의 바이올린을 무릎으로 부수어 버려야겠군”이라고 농담을 건넸다고 한다. 두 사람은 서로의 연주회에 참석할 뿐만 아니라 사적으로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하이페츠의 트레이드 마크는 꼿꼿이 세운 활과 바이올린, 감정에 동요되지 않는 무뚝뚝한 연주 모습이다. 이러한 레오폴드 아우어식의 러시아 연주 스타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듯이, 그의 차가운 듯한 냉정한 음색은 바흐나 모차르트와 같은 몇몇 작품들의 연주에서는 많은 질타릉 받기도 했다.
협주곡 외에 그가 녹음한 소품을 들어보면 또한 얼마나 황홀한 톤을 가지고 있었는지 가늠할 수 있다. 현재의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 중의 한 명인 이자크 펄만은 하이페츠의 빠른 비브라토와 감각적인 포트라멘토에서 기인하는 그 마법적인 음색에 찬사를 보낸 바 있다. 그는 중후한 음색을 자랑하는 1742년 엑스 다비드 과르네리 델 제수를 주로 사용했다.
그러나 정작 바이올린 자체보다도 그가 사용한 활이 독특한 사운드를 만들어내는 비결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평생토록 여러 개의 활을 사용했다. 그런데 유독 스승인 아우로부터 선물 받은 1860년 산 ‘니콜라우스 키텔’ 활을 자주 사용했는데, 58g 정도의 중간 무게의 이 활은 그가 자유자재로 보잉과 프레이징을 만들어내기에 무척이나 편했다고 한다.
완벽주의자 하이페츠
1950년대부터 60년대는 그의 창조력과 지구력이 원숙함을 더하여 최고조에 도달했을 시기로서, 스테레오 농음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새롭게 명반을 만들어내며 수많은 연주자들을 좌절케 하고 음악 애호가들로 하여금 절대적인 기준인 양 그를 숭배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자신은 결코 제왕처럼 군림하려고 한 적도 없을 뿐만 아니라 항상 청중과 작품, 그리고 작곡가들에게 겸허함을 바치고자 노력했다. 단 한 가지 그가 일체의 타협을 허용하지 않았던 대상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음악에 있어서 완벽에 가깝게 다가가기 위해, 그는 자신에게 혹독한 고문이라고 할 수 있는 완벽주의자로서의 잣대를 쉼 없이 들이댔던 것이다. 그는 만년에 제자인 에릭 프리드만에게 조언하기를 “이보게, 에릭, 나 또힌 음정이 틀리게 연주하곤 한다네, 왜냐하면 나도 인간이니까.”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고 한다. “저 무대 위에 있을 동안은 아무도 틀리게 연주한다는 것을 지적해주지 않는다네.”
하이페츠의 은퇴
아르투로 토스카니처럼 자신이 더 이상은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청중들 앞에서 만큼은 완벽함을 보여주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던 하이페츠. 그는 오른쪽 어깨 수술한 후유증으로 이전처럼 활을 높이 들 수 없었던 탓에 1972년 무대에서 은퇴했다. 이후 남부 캘리포니아 대학과 자신의 집에서 평생의 동료인 첼리스트 피아티고르스키와 윌리엄 프림로즈와 함께 후학을 형성했다.
1987년 12월 10일 위대한 바이올린의 세기가 끝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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